3) 자본주의의 발전
이상과 같이 국가가 경제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절대왕권으로 상징되는 국가권력이 매우 강대했던 관계로, 또한 절대왕정은 끊임없이 돈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정치권력과 경제활동이 결탁할 가능성이 짙었다. 따라서 실제로 독점권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경제적 특권이 절대왕권에 의해 남발되기도 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특권이나 독점권 등을 자본주의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한 것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확실히 특권이 자유로운 자본주의의 발전을 저해한 면이 있기는 했으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특권의 효과 측면에서 보면 두 종류의 특권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하나는 특권 상인과 절대왕정 내지 궁정 주변에 그 혜택이 국한되고 아무런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경우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남부 독일의 푸거가를 들 수 있다. 16세기의 푸거가는 남부 독일의 거상이자 국제적인 대금융업자로서 교황을 비롯한 수많은 군주와 귀족에게 돈을 빌려주고 여러 특권을 획득하여 유럽의 정계와 경제계를 좌우할 정도였다. 그러나 푸거의 이러한 경제활동이나 특권은 독일의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었고, 16세기 말에는 빚을 변제받지 못해 쓰러지고 말았다. 이와는 반대로 경제적 특권이 특권을 가진 상인이나 왕실에게 혜택이 돌아갈 뿐 아니라 국가의 기간산업에 기여하고 국부를 전체적으로 증대시킴으로써 자유로운 상공인을 배출하고 자본주의의 발전에 궁극적으로 공헌한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국의 이른바 모험상인조합이다. 이 모험 상인들은 모직물 수출의 독점권을 가지고 있는 영국의 대상인들로서 그들은 모직물의 해외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함으로써 영국의 국민적 산업으로 성장하고 있던 모직물 공업의 발달을 통해 국부를 증대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특권은 언제나 자유에 어긋난다 하여 이를 일률적으로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당시의 경제적 현실과 그 특권이 영향을 미친 효능을 아울러 검토하여 평가해야 한다.
이러한 특권의 문제와 더불어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또 하나의 문제는 초기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 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게 한 것이 상업자본이냐 산업자본이냐 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상업자본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며 진정하게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것은 산업자본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경제적 현실과 상황을 냉정하게 살핀다면 상업자본이 경제발전에 기여한 정도가 산업자본보다 오히려 컸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영국의 모직물 공업은 도시 길드의 제약을 피해 그러한 제약이 없는 농촌 공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 구체적 형태로서는 선대 제도와 manufacture가 있었다. 선대 제도는 상인이 농민에게 원료와 방직기 등 필요한 시설을 공급하고 생산된 모직물을 노임에 해당하는 대가를 지불하고 거두어 가서 판매하는 제도이다. 이 경우 상인은 자본가요 농민은 임금노동자라고 할 수 있으며, 다만 그 일터가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을 뿐이다. 매뉴팩처는 직접 생산자가 성장하여 자본가가 되고 한 장소에 노동자를 모아 놓고 모직물을 생산하는 형태로서, 이는 방직기 같은 것을 기계로 바꾸기만 하면 그대로 공장이 될 수 있는 생산 형태였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는 후자가 진정한 자본주의 발전의 길이라고 주장하고 선대 제도는 상인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본주의의 발전을 저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선대 제도가 오히려 더 많이 행해지고 선대 제도를 지배한 상업자본이 산업혁명기에 산업자본으로 전환한 예도 많았다. 이는 비단 영국에 한정되거나 모직물 공업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 유럽적인 규모로 광범한 분야에 걸쳐 일어난 현상이었다. 따라서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을 도시적으로 구분하여 대립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양자가 다 같이,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상업자본의 우세 속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에 공헌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4)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신항로와 신대륙의 개척에 앞장섰던 이베리아 반도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이러한 개척이 가지고 온 혜택을 차지하여 가장 먼저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특히 펠피페 2세 시대의 에스파냐는 네덜란드, 나폴리, 밀라노, 시칠리아 등을 영유하고 신대륙인 아메리카에서는 멕시코와 페루, 아시아에서는 필리핀을 식민지로 가지는 동시에 포르투갈까지 병합하여 그 식민지도 아울러 지배하게 되어, 문자 그대로 해가 지는 일이 없는 나라로서 황금기를 맞이했다.
펠리페 2세는 이러한 광대한 영토를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통치와 종교재판을 통한 카톨릭 중심의 종교적 통합으로 다스려 나가려고 했다. 에스파냐의 경제적 번영은 아메리카의 식민지로부터 들어오는 여러 가지 새로운 물자와 특히 금은을 비롯한 귀금속, 그리고 이에 자극받아 발달하게 된 국내 산업, 모직물 공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의 절대왕정은 국내 봉건 세력과의 투쟁과 제압을 통해 성립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도와의 투쟁 과정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성격이 강할 뿐 아니라 봉건 세력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 있어 사회, 경제 발전의 큰 장애요인이 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펠리페 2세의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에스파냐의 모직물 공업은 영국 모직물 공업의 진출에 압도되어 쇠퇴의 길을 걷게 되고 모처럼 아메리카로부터 들어오는 귀금속도 다시 밖으로 유출되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대외적으로도 레판토의 해전에서 투르크를 격파해 지중해의 지배권을 획득한 것을 고비로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에 시달리고 무적함대가 영국에 패함으로써 에스파냐는 결정적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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