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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사

중세 봉건사회의 변화

by 챠곡 2023. 2. 15.

 봉건제와 로마 카톨릭 교회를 기반으로 하여 성립한 서유럽 사회는 11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정치적 안정과 사회, 경제적 성장의 길로 들어섰다. 이렇게 서유럽 사회가 안정과 성장의 길을 되찾자 사회 내부에 충만한 힘이 외부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곧 십자군 원정이다. 그것은 로마 교황의 제창에 따라 서유럽의 국왕, 제후, 기사, 심지어는 농민까지도 힘을 합해 이슬람교도들에게 빼앗긴 땅을 회복하려는 싸움이었으며 봉건제와 카톨릭 교회에 입각한 서유럽 사회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은 결국 서유럽 사회의 변질을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원정의 실패는 그렇지 않아도 세속화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던 교황과 교회의 권위를 더욱 떨어뜨렸으며, 이 무렵 벌써 성장하기 시작한 상공업과 도시를 더욱 발전시켰다. 이리하여 상공업의 발달에 따른 화폐경제의 보급과 도시의 발전에 따른 시민 계층의 대두로 봉건사회의 경제적 기반인 장원제의 기틀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그 결과 기사 계층의 특권적 지위가 흔들리게 되었다.
 한편 도시에서 시민 계층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이들의 지지를 얻은 국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봉건제후의 세력을 눌러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는 데 전력했다. 이와 함께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의 경향이 더욱 심해져 중세 말기에는 교회의 개혁을 외치는 소리가 점점 높아 갔다.
 이처럼 정치, 종교, 경제 등 사회 각 방면에 동요와 불안이 고조되는 가운데 중앙집권적 국민국가의 성립, 대규모적인 상공업의 발전, 종교개혁, 르네상스 등 근대 유럽의 탄생을 알리는 여러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다.

십자군

1. 십자군과 도시의 발달
1) 십자군
 게르만족의 이동 이후 계속된 혼란상태가 끝나 서유럽 사회가 봉건영주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지배하에 안정을 되찾고 점차 성장의 길로 들어서게 되자, 서유럽 세계는 그 세력을 외부로 신장하는 기운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동방에서는 새로 셀주크 투르크가 일어나 아바스조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하고 소아시아를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빼앗아 직접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서쪽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한때 열세에 몰려 있던 이슬람교도들이 알모라비드조 하에서 다시 힘을 되찾아 아라곤, 카스티야 등 북부 그리스도교 국가들에 대한 반격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7세기 말 이래로 줄곧 공격만 당해 왔던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가 이제는 거꾸로 공세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이래서 일어난 것이 바로 십자군 원정이었다. 이것은 그동안 거듭된 이슬람교도들의 유럽 세계 침범에 대한 하나의 보복전이라 할 수 있으며, 전성기에 접어든 중세 유럽 사회가 밖으로 그 힘을 과시하고 뻗쳐 나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십자군 원정의 직접적 계기를 만든 것은 비잔틴 황제였다. 11세기 후반 셀주크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자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는 로마 교황 우르반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때마침 황제 하인리히 4세와의 싸움에서 우세를 굳히고 있던 우르반 2세는 이를 받아들여 성지 탈환의 성전을 일으킴으로써 동서로 갈라진 교회를 다시 통합하여 스스로 그 우두머리가 될 것을 기대했다. 그는 중부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에 대한 셀주크 투르크인들의 박해상을 들추면서 성지 회복을 위한 성전을 일으킬 것을 촉구했다. 공의회가 끝난 뒤에도 그는 프랑스 각지를 순회하면서 성전을 호소했고, 다른 열광적인 설교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들의 호소에 감동되어 모여든 군주가 기사들이 저마다 가슴에 붉은 십자 표시를 달고 예루살렘을 향해 떼를 지어 떠났다. 이렇게 시작된 십자군 원정은 그 후 13세기 후반까지 약 200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그중 대규모적인 것만도 7, 8회나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여러 번에 걸쳐서 수많은 인원이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의 성과는 대수로운 것이 못 되었다. 종교적인 열광으로 성지를 향해 나아간 최초의 십자군은 어렵게나마 성지에 도착해 이를 이슬람교도의 수중에서 탈환하고 여기에 봉건제에 입각한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군 자체의 힘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슬람교도들의 분열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 후 이슬람교도들이 세력을 규합하여 그리스도교도들을 공격하자 1187년 예루살렘은 다시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이 이후에도 몇 차례 시도되었으나, 제5회 때 역시 이슬람교도들의 내분을 이용해 잠시 성지를 되찾았을 뿐, 예루살렘은 줄곧 무슬림의 지배하에 남아 있었다.
 본시 십자군은 조직화, 체계화되지 않은 군사행동이었다. 위로는 국왕에서 아래로 농민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가한 이 원정군은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했으며, 국왕이나 제후 등 지휘자들 사이에 의견 대립이 잦아 통인 된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군장비도 각각 다른 데가가 체계적인 훈련도 받지 못했고 군기 또한 엉망이었다. 더욱이 보급망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 식량을 비롯한 모든 보급품은 원정 도상의 현지에서 조달해야 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오합지중이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제1회 십자군 때 맨 먼저 원정길에 올랐던 농민 십자군으로, 이들이 지나간 유럽의 마을들은 그들의 약탈과 방화 그리고 무자비한 살상을 견디어 내야만 했다. 수 백 명의 정예 기사로 된 구원 병력을 기대했던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는 이 인간 메뚜기의 대군에 놀라 서둘러 이들을 해협 너머 소아시아의 땅으로 호송해 보냈다. 소아시아에 들어간 뒤에도 그들은 저희끼리 싸우고 그곳 그리스도교도들을 죽이는 일에는 능했으나, 막상 투르크족과의 싸움에서는 대패하여 섬멸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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