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게 문명
고대 문명이 발달하고 있었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 기원전 3,000년기와 2,000년기 동안에 지중해의 크레타섬에는 다른 또 하나의 문명이 성장하여 점차 에게해의 여러 섬과 그리스 본토, 소아시아의 서부지역에 전파되고 있었다. 그러나 약 150년 전만 해도 이 문명에 대해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다. 그레타의 미노스 왕에 관한 공상으로만 여겨져 왔다. 하지만 19세기 말부터 몇몇 학자의 발굴과 연구를 통해 그것들이 한낱 허구가 아닌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것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에게 문명 중에서도 가장 먼저 발달한 크레타 문명은 영국의 고고학자 Sir Arthur Evans의 연구와 발굴의 결과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미노스 왕의 이름을 따라 미노아 문명이라고도 불리는 크레타 문명은 기원전 3,000년기 중엽에 청동기시대에 들어선 것으로 보이는데, 그 전성기는 기원전 2,000년부터 1,500년경까지였다.
2) 폴리스의 성립과 발전
고대 그리스 역사는 폴리스의 성립과 더불어 시작했다. 그리스 철학의 완성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인 '정치학'에서 인간을 '폴리스적 동물'이라 규정한 만큼 고대 그리스인에게는 폴리스가 그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의 역사는 곧 폴리스의 역사이며 그리스의 문화는 곧 폴리스의 문화이다. 그리스 역사가 폴리스의 성립과 더불어 시작한다는 것도 이러한 견지에서 한 말이다.
그러나 폴리스의 성립이 갖는 더 큰 역사적 의의는 그것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전체 서양 역사와 전체 서양문화의 참다운 시작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서양사람은 대체로 서양 역사와 서양문화는 그리스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빛이 오리엔트로부터 왔다는 것, 특히 서양문화의 중요한 하나인 그리스도교적 전통이 오리엔트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그들도 인정한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서양문화의 더 근원적인 전통은 그리스에 기원을 둔다고 생각한다. 자센들은 오리엔트인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인식하는 생각 자체가 바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전제군주제 하에 얽매어있던 오리엔트인들과는 달리 그들의 자유스러운 시민으로 구성된 공동체 국가, 즉 폴리스를 형성하고 유지했다는 의식이 있었다. 그러한 폴리스를 만들어 냄으로써 고대 그리스인들은 서양세계가 장차 가지게 되는 국가 형태의 원형을 마련했다고 서양인들은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폴리스의 성립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서양사와 오리엔트 역사, 더 나아가서는 서양 역사와 동양 역사가 갈라서는 분기점이라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폴리스가 누구에 의해, 언제, 어떻게 세워졌는지는 아직도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기원전 800년경에 이르면 에게해 주변 각지에 많은 소국들이 분립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들 소국들은 산이나 바다와 같은 자연방벽에 의해 서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그 주민들은 흔히 언덕 위에 구축된 성채를 중심으로 모여 살고 있었다. 이들은 미케네 시대의 왕국들보다는 도리아인들의 침입 때 분열된 지방 공동체, 즉 촌락보다는 컸다. 이러한 소국들이 곧 폴리스였다.
3) 스파르타와 아테네
그리스 모든 폴리스들이 한결같이 귀족정에서 민주정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 철저한 민주정으로 나아간 폴리스가 있었는가 하면 초기 귀족정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폴리스도 있었다. 제각기 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자기에게 알맞은 제도를 받아들였다. 아테네는 전자의 대표적 경우이고 스파르타는 후자의 대표적 경우였다.
도리아인들이 선주 그리스인들을 정복하여 세운 폴리스였던 스파르타에서는 스파르타인들이 선주민의 대부분을 헤일로타이라는 노예로 삼아 시민들의 토지를 경작하게 하고 그 수학물을 공납으로 바치게 했는데, 이들의 신분은 중세의 농노와 비슷했다.
스파르타에는 두 사람의 왕이 있었으나 행정의 실권은 1년 임기로 선출된 행정관인 5명의 에포로이에게 있었다. 시민들의 회의로서는 민회와 원로원이 있었는데, 원로원은 법안의 제안권과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민회는 법안의 표결권과 공직자의 선출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듯 스파르타에서는 행정의 실권은 에포로이에게, 입법의 실권은 원로원에게 있었으나 최종적인 결정권은 역시 전 시민의 모임인 민회에 있었다. 바로 이와 같은 귀족정과 민주정의 혼합체제야말로 스파르타 국제의 두드러진 특징이었으며, 당대의 많은 그리스인에게 아테네 국제보다는 오히려 스파르타 국제가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된 까닭 또한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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