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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사

문명의 발상

by 챠곡 2023. 2. 15.

 문화(culture)라는 말이 경작(culture)에서 유래하듯, 문명(civilization)이라는 말은 도시(city, civitas)에서 유래한다. 인류 최초의 문명은 원시 농촌이 도시로 발달한 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농촌이 도시로 발달한 것은 큰 강 유역에 관개농업이 발달한 결과 농업생산이 늘어나고 많은 인구가 한 곳에 모여 살 수 있게 되면서부터이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의 두 강 사이의 땅인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부터 관개농업이 시작되었다. 특히 두 강의 하류 지역에서는 기원전 3,500년경부터 여러 곳에 큰 촌락들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이와 아울러 동기나 청동기가 제작되기 시작하고 쟁기, 수레바퀴, 돛단배 그리고 중요한 문자 등이 발명되어 생산이 늘어나고 교역도 활발해졌다.
  두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에 처음 정착한 주민은 수메르인들이었다. 수메르인들이 처음으로 강 하류 지방에서 본 것은 해마다 반복되는 홍수 때문에 발생한 초목이 우거진 늪지였다. 수메르인들은 나일강 하류 지역에 정착한 이집트인들처럼 늪지를 간척하여 경지를 만들었다. 홍수에 밀려온 흙이 쌓인 땅은 기름지고 태양빛과 물도 풍부하여, 원시 농업에 비해 생산량이 많이 늘어났으며, 생산이 늘자 인구의 집중이 가능하게 되어 도시가 성장할 수 있었고, 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문명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홍수에 대비하고 홍수를 활용한 관개농업은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 또는 '기름진 초승달'이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유리한 조건만 갖춘 것은 아니었다. 제방을 쌓거나 수로를 파는 일, 홍수가 휩쓸고 간 뒤에 경지를 다시 정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외의 자연조건도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집중적인 폭우 전에 지속되는 오랜 가뭄, 낮과 밤사이의 심한 기온차, 습한 늪지대, 황량한 사막과 언덕 등이 그들이 극복해야 했던 자연조건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러한 자연조건들을 극복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만 했다. 지속적인 협동 작업과 노력이 필요했다. 협동 작업은 범위가 넓을수록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에 여러 촌락이 서로 연합하기 시작했고, 그 중심으로서 도시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수메르인


 홍수는 수메르인들의 농경의 원천인 동시에 큰 두려움의 대상으로, 주요 관심사였다. 창세기의 '노아의 홍수' 스토리는 실은 수메르인이 남긴 길가메시의 서사시에 나오는 홍수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홍수가 밀어닥친 뒤 사람들이 진흙으로 변해 있었다는 것이나, 비가 그친 후에도 산꼭대기에 매달린 배가 6일 동안 그대로 있었다는 이야기 등은 이 지역 주민들이 겪은 유프라테스강의 대홍수의 참상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한편 도시의 형성과 더불어 시작된 청동기의 사용은 농업생산을 더욱 증대시켰고 동시에 더욱 강력한 무기를 발달시킴으로써 주민 사이에 사회적 분업이 이루어지고 계층 분화가 일어나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또한, 농경의 성패를 좌우한 자연이 여러 신으로 숭배되어 신전이 도시의 중추가 됨으로써 신관의 권위가 커져 각 도시는 사실상 신관 계층에 의해서 지배되는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여러 도시 사이에서는 교역이나 관개를 둘러싸고 대립이 나타나 도시마다 성벽을 둘러싸고 전사를 길러 외적에 대한 방비를 굳건히 하는 한편 안으로는 신관 계층에서 나온 왕의 권한이 점점 강화되어 신정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이러한 도시국가가 기원전 3,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지방에 많이 건설되었는데, 인류의 문명은 수메르인들이 세운 이러한 도시국가들 안에서 맨 처음 발달하게 된 것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수메르인들은 적어도 기원전 3,000년경에 벌써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처음 사용한 문자는 그림문자였다. 이 문자는 오리엔트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로 어쩌면 이집트 그림 문자도 이 문자를 따라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고 있다. 수메르인들은 이 문자를 진흙판에 그렸다. 이후 기원전 3,000년에서 기원전 2,000년 사이에 일종의 표음문자를 만들어 냈다. 말랑말랑한 진흙판에 쐐기 모양의 표식을 찍은 후 말려서 보존하였다. 이것이 곧 유명한 설형문자이다. 후에 페니키아 인들이 이것에서 더욱 간편한 표음문자인 알파벳을 만들어 내었고 그 후 다시 그리스인들이 페니키아 문자를 본떠 그들의 알파벳을 만들어 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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